이스트포인트의 원탁에는 상석이 없다
두 번째 이스트포인트(EastPoint)를 마쳤다. 9월 28일 웨스틴 파르나스에 약 270개 기관에서 600명이 모였다. 다만 행사를 준비한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 것은 숫자보다 자리일 것 같다. 누가 어느 탁자에 앉았는지, 어떤 대화가 끝까지 이어졌는지.
https://www.eastpoint.xyz
이스트포인트를 만들기 전, 해시드는 7년 동안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orea Blockchain Week)를 공동주최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퍼블릭 블록체인 컨퍼런스로 자란 그 행사를 통해, 블록체인이 낯설던 시절 많은 사람에게 이 산업의 가능성을 소개하려 애썼다. 다만 해를 거듭하며 한 가지 질문이 점점 무거워졌다. 무대의 이야기는 그날 저녁 영상으로 공개되고, 이튿날이면 요약되어 퍼진다. 청중으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온라인이 더 효율적인 시대다. 그렇다면 먼 길을 와서 한 공간에 모이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
오랜 논의 끝에 우리가 찾은 답은 대화에서 나오는 영감이었다. 정보를 전하는 일은 이미 인터넷이 넘겨받았다. 오프라인에 남은 가치는 서로를 존중할 만한 전문성과 고민을 지닌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한 채 생각을 시험해 보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작년 이스트포인트는 처음부터 초청제 프라이빗 컨퍼런스로 설계했다. 원칙도 하나 세웠다. 모든 참석자는 발표나 패널, 또는 하나 이상의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여 증명(proof of contribution)이라 불렀다. 블록체인의 합의에 참여하려면 연산이든 지분이든 무언가를 걸어야 하듯, 이스트포인트에 들어오려면 자기 관점을 걸어 달라는 뜻이었다.
이 원칙이 옳은지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조건 때문에 참석을 사양한 분도 있었고, 조용히 듣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문을 좁히는 선택이 맞는지 준비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원칙을 지킨 것은, 예외가 쌓이면 대화의 자리가 다시 관람의 자리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하루 동안 38회의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두 번째 행사를 치르며 이 원칙이 어느 정도 작동한다는 믿음을 조금 더 갖게 됐다. 곧 자기 의견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남의 발표도 다르게 듣는다. 모두가 기여한다는 전제 하나가 청중을 대화의 참여자로 바꾸었다. 원칙을 세운 것은 우리였지만, 그것을 문화로 만든 것은 탁자에 함께 앉아 준 분들이었다.
1회차와 가장 달라진 점은 탁자에 앉은 이들의 얼굴이었다. 은행과 증권사, 카드사, 자산운용사의 대표급 인사들이 작년보다 훨씬 많이 찾아 주었다. 작년만 해도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인프라의 금융권 전면 도입은 조금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올해는 모두가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챙겨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대화에서 체감했다. 작년의 질문이 "언제 오게 될까"였다면, 올해의 질문은 "어떤 순서로 준비해야 하는가"에 가까웠다. 질문이 바뀌면 산업의 시간표도 함께 움직인다.
원탁에는 상석이 없다. 아서왕의 원탁이 그런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두 번의 행사를 치르며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됐다. 상석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대등하다는 뜻인 동시에, 누구도 한발 물러서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굴이 보이는 거리에서는 말이 신중해지고, 동시에 솔직해진다.
내 기조연설의 제목은 '동쪽의 낙관론자들'이었다. AI가 가장 싸게 만든 것은 지능보다 틀림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몇 달짜리 착각이 이제 몇 시간짜리 실험으로 끝난다. 실수는 장부에 남지만, 하지 않은 시도의 비용은 어느 장부에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낙관을 믿음의 크기보다 표본의 크기로 정의해 보고 싶었다. 더 많이 해 보고 더 많이 틀려 본 사람이 현실을 더 빨리 배운다. 틀림이 싸진 세상에서 낙관은 타고난 성격보다 합리적인 전략에 가깝다. 정답을 빨리 찾는 데 익숙했던 한국에게, 정답이 없는 시대에는 틀리는 속도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능이 싸질수록 가장 비싸지는 것은 신뢰라고 덧붙였다. 올해 다섯 주제 가운데 AI 에이전트와 스테이블코인에 특히 무게가 실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이야기는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가장 똑똑한 AI도 아직 은행 계좌를 열 수 없고, 한 달 5달러짜리 서버 하나도 스스로 사지 못한다. 계좌와 서명과 창구가 모두 사람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에이전트는 쉬지 않고 몇 원짜리 거래를 초 단위로 수천 번 주고받는다. 그런 존재에게 영업일과 최소 수수료로 짜인 결제망은 너무 느리고, 키 하나로 소유를 증명하는 지갑과 프로그래밍 가능한 달러는 처음부터 맞는 문법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를 크게 늘릴 주체는 사람보다 에이전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오랫동안 블록체인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불편한 사용자 경험에서 찾았다. 어쩌면 사용자를 잘못 상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블록체인의 진짜 사용자는 에이전트가 될 것이라고 본다.
남은 빈칸은 신원이다. 결제는 이미 많은 회사가 만들고 있지만, 이 에이전트가 누구 편인지 증명하는 일에는 아직 주인이 없다. 세계의 에이전트가 서울에서 첫 신원을 받고 첫 결제를 하게 된다면, 한국도 규칙을 함께 쓰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정책을 만드는 분들께 '안 된다'에 날짜를 붙여 달라고 부탁드렸다. 규제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지만, 태어나지 못한 회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능성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 긴 거리가 있다.
돌아보면 연단과 탁자는 같은 질문을 향해 있었다. 라운드테이블은 법보다 낮은 비용으로 생각을 틀려 볼 수 있는 곳이다. 좋은 규칙은 대개 그런 대화가 오래 쌓여 만들어진다. 경제의 많은 부분이 에이전트에게 넘어갈수록, 사람들이 마주 앉아 무엇을 시작할지 정하는 자리는 오히려 더 필요해질 것이다.
몇 해 뒤의 이스트포인트를 그려 본다. 기여 증명은 에이전트에게도 적용된다. 에이전트는 등록 단계에서 누구를 대리하는지, 어디까지 약속할 수 있는지, 일이 틀어지면 누가 책임지는지를 증명한다. 정산은 에이전트끼리 끝내 두고, 사람에게는 무엇을 시작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일이 남는다. 그 탁자에 수많은 개인 투자자의 목소리를 모은 에이전트가 한 자리를 얻는다면, 지금의 행사가 닿지 못하는 사람들도 논의에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초청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좁힌다. 그 문 밖에 있을 작은 스타트업과 지역의 금융기관,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연구자들을 자주 떠올린다. 내년에는 탁자를 키우기보다 원탁의 수를 늘려 보려 한다. 우리도 아직 배우는 중이다.
이 자리는 많은 분이 함께 만들었다. 공동으로 행사를 준비한 블루밍비트와 한국경제신문, 함께 애쓴 해시드 플랫폼 팀, 해외에서 와 준 연사들, 그리고 긴 시간을 내어 테이블에 앉아 생각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Post #5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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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warded from Carrot Cave 🥕




